들어가기 앞서
'자기계발 하는 방법'을 파는 건 돈이 된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나 하나를 바꿀 수는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문에 20년 전에도, 20년 후에도 자기계발 시장은 스테디셀러일 것이다.
특히 IT 업계는 자기계발에 엄청 진심인 사람들로 모인 집단이다. 내가 아는 거의 대부분이 회사를 다니면서도 시간을 쪼개 스터디를 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다.) 뿐만 아니라 강의나 멘토링, 유튜브나 집필 활동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몸이 몇 개인지 모를 사람들도 꽤 있다.
그야말로 이 바닥은 꾸준히 '갓생' 열풍이다. 주변에서도 개인 시간을 줄여가며 자기 계발을 하거나 대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누군가 스터디를 5개 정도 한다거나 하면 하나같이 그를 칭찬한다. 그런데 그의 신체나 정신 건강은 과연 안녕한 걸까?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만나 본 개발자들 중 대부분은 어딘가 아프거나 곪아 있었다. '갓생'은 그저 전시하고 싶은 페르소나일 뿐. 어쩌면 '갓생'을 사느라 그저 닝겐(인간)일 뿐인 본인의 생명력을 제물로 바친 게 아닐까 싶다.
당신이 하는 일은 그렇게 생산적이지 않다
얼마 전에 SNS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가 200 건 넘게 공유가 된 적 있었다.
"내가 관찰해 보니까 이쪽 사람들 생산성 타령 겁나 하면서 그렇게까지 생산성 있는 일 하지도 않고 그냥 도시 노동자들이 깔아놓은 인프라에 빨대 꽂아서 노트북이나 하는 게 다임. 내 말 틀림?"
이 글이 여러 번 공유되고 놀랐던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발언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난 당시 화가 나서 비난받을 각오로 한 말이었는데.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싶다.
IT 업계 사람들이 '생산'적이라고 하는 건 대체로 착각이다. 특히 변변한 BM을 갖추지 못한 스타트업 C레벨이 그런 말을 한다면 데스밸리는 어떻게 넘겼는지, 앞으로 어떻게 사업을 유지하고 확장할 건지 묻고 싶다.
대체로 3-4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진짜 '생산'적인 일을 도시 빈민이나 이주노동자들에게 외주 넘기고 노트북 앞에 앉아 본인이 속해 있거나 본인이 투자한 회사의 주식이 오르길 바라고 있다.
이들은 실제 사용자가 있을까 말까 한 프로덕트를 만들고 보통 사람들의 삶과 동떨어진 교육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스스로의 몸값이 오르길 바라며 스스로를 '생산성'을 위해 노력한다고 포장한다. (그 와중에 전주에서는 19세 제지공장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다.)
지난 16일 전주 팔복동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19살 노동자 ㄱ씨의 생전 메모장. 민주노총 전북본부 제공
좀 세게 말했나? 냉정하게 말해 여러분이 하는 공부도 작성한 코드도 내가 하루에 포장하고 출고한 택배량보다 생산적이지 않다. 왜 이런 말을 하냐고? 나는 최저임금을 받고 몸을 갈아서 이 도시의 욕망을 다이렉트로 충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깔아둔 인프라를 소비하면서 무엇으로 이 도시에 기여하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빅테크 기업에 속해 있지 않다면, 나는 당신이 생산한 서비스 중 무엇도 소비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도 그래서 빅테크 기업에 입사하고 싶은 게 아닌가?)
도시의 인프라에 빨대 꽂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이나 하면서 '생산성', '일에 진심인' 같은 키워드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3-4차 산업 종사자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맥북에다 커피를 쏟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다. 왜냐고? 난 생산과 산재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현장에서 기어올라 왔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성장'을 이유로 기피하고 무시한 그 곳에서!)
산재의 위험과 직면해본 적도 없으면서, 산재로 사망하는 노동자들이 깔아둔 인프라를 착즙하며 스스로를 '생산적'이라고 포장하는 건 산재 노동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결국 중요한 건 '수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IT 업계 종사자들이 '생산성' 있는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 공부와 자기계발에 시간과 돈을 쪼개 쓴다. 다들 수능 보고 대학 입시를 한 세대라 그런지 '개발자 입시'를 통과하고 나서도 또 다른 입시에 뜬눈으로 밤을 보낸다. 잠은 죽어서 자면 되고 지금은 '성장'해야 하니까. '생산성' 있는 프로젝트를 배포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성과를 낸 여러분의 육체나 정신 건강은 안녕한지를 먼저 묻고 싶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아이유가 한 말을 스스로에게도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열심히 살았나?
열심히 한 건 일밖에 없구나.
다른 거는 남들보다 열심히 못했구나.
주변을 잘 돌봤나?
스스로를 잘 돌봤나?
내 집이 잘 정돈되어 있나?
내가 중독된 건 성취, 보람이 아닌 일이 주는 자극적임이었구나.
이게 과연 건강한 '열심'이었나?
음악으로 수많은 대중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선사해 준 아이유조차도 스스로한테 이렇게 반문하고 있다. 당시 방송에서 그녀는 '에너지를 많이 당겨 쓴 것 같다'며 '관절이나 면역력이 안 좋다더라. 30대가 되면 나를 조금 더 돌보고 여유를 가지면서 일해야 할 것 같다'고 고백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자기계발을 하는 건가? 그 공부와 활동이 스스로와 주변을 잘 돌보지 못하고 방치할 정도의 가치가 있나?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당신이 현업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해 고민이라면 스터디나 다른 대외 활동을 늘리는 대신 스스로를 먼저 돌보길 바란다. 어차피 이 도시의 생산성은 도시 빈민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갓생'이란 페르소나 뒤에서 전기랑 시간, 카페인 등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때문에 의미 없는 자기계발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대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아는 게 중요하다.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를 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작가는 책에서 번아웃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마주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프로그래머라면 대체 뭐부터 문제인지 치열하게 사유하길 바란다. 자기가 처한 문제도 제대로 정의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프로그래머가 고객이나 사용자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오만한 판단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개발자들 쓸데없이 자의식이 과하다.)
유교 경전인 <대학>에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다. 스스로를 돌보고 가정을 만들고 나라를 다스리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동양 철학이나 한자를 잘 몰라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앞선 개념을 실천해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은 '수신'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본인이 직업인으로서 타인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다면 우선 스스로를 잘 돌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아무리 일이 주는 자극이 강하다 하더라도 일은 자기 자신이나 주변 환경, 사랑보다 중요하지 않다. 일을 위해 자기 돌봄과 주변 환경을 포기한다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특히 회사원이라는 지위는 일종의 전세살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다면 직업인으로서 정점에 올라선다 하더라도 공허하고 금방 무너질 뿐이다. 롱런하고 싶다면 일단 수신부터 하자.
기술 부채보다 중요한 건 수면 부채
지금부터라도 공부나 시험, 대외 활동 등에 임하기 전에 자문해보자.
주변을 잘 돌봤나?
스스로를 잘 돌봤나?
내 집이 잘 정돈되어 있나?
한 가지라도 아니라는 답이 나왔다면 스터디를, 프로젝트나 대외 활동을 줄여서라도 스스로를 돌보자. 생각보다 '기술 부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트렌드의 변화가 빠른 프론트엔드 씬에 발을 들이고 나서 (내가 빌리지도 않은) 기술 부채를 갚기 위해 눈에 불이 나도록 트렌드를 따라갔지만, 생각보다 현업에서 채택한 기술의 변화는 빠르지 않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때문에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이 기술을 왜 사용하는 건지, 어떻게 사용해야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지라고 생각한다. '순공 시간'을 채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지 말자는 얘기다. (어떤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사법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공부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 사법 시험 수험생들조차 집중해서 공부하는 시간이 8시간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집중할 수 있을 때 확실히 집중하고, 집중력이 소진되었을 때는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데 할애하자.
모든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낼 필요는 없다. (또 나는 도시의 3-4차 산업 노동자들이 모든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고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집중을 유지할 수 없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는 확실히 풀어주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쉬는 시간에 주로 아동용 만화(포켓몬스터)를 보며 힐링을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활동적인 사람들은 운동이나 액티비티를 하면서 피로를 풀고,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전시회나 콘서트, 뮤지컬 등을 보면서 충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이돌 덕질을 하기도 하고, 개발 서적이 아닌 책을 읽으며 생각을 비우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잠이다.
수많은 의사들이 최소 7시간 이상은 숙면을 취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수면이 우리 건강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마스터 키기 때문이다. 수면이 부족하면 인지 기능이 떨어져 집중력과 기억력이 감퇴한다. 정신 건강에도 문제가 생겨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우울이나 불안장애 등의 정신질환을 악화시킨다.
무엇보다 수면이 부족하면 체중이 늘고 만성 피로에 시달린다.
그런데도 잠은 죽어서나 자겠다고? 불어난 체중으로 평생 만성 피로에 시달리며 떨어진 집중력과 기억력으로 '갓생'을 살고 싶단 말인가? 그건 '갓생'이 아니라 '워킹 데드'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제발 좀 잘 때는 잠을 자자.
기술 부채는 언젠가 갚을 수 있지만 수면 부채는 온몸이 이자를 높게 쳐서 리볼빙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