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앞서
요즘 SNS를 하다 보면 "물경력 탈출" 등을 언급하며 저연차 개발자들의 불안을 자극하는 부트캠프 광고를 종종 보게 된다. 작년이었다면 그런 광고에 현혹되어 불안과 스트레스에 빠졌겠지만, 험난해진 채용 시장 속에서 방황하며 나름 강해진 터라 데미지를 받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코노적 사고'로 FOMO를 자극하는 마케팅을 튕겨내고 있어도 내 주변 취준생들이나 저연차 개발자들의 불안까지 해결하진 못한다. SNS나 커피챗 등으로 이들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마주하고 있다 보면 나 역시 거기에 노출된다. 요즘은 IT 업계가 전반적으로 안 좋아져서 저연차가 아닌 미들급 개발자들 역시 이런 불안에서 자유로워 보이진 않는다.
이 바닥에서는 뉴비지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방황도 해볼 만큼 해본 나의 생각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조금은 덜 불안해지기를 바란다.
(구글에 '물경력 탈출'을 검색해 보았다.)
성장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서른이 되고 첫 번째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위해 6개월 안에 취업 못하면 보증금을 환급해준다는 교육 업체에 등록했다. 거기서 담당자랑 상담을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었다.
"성장을 하려면 공장에 가면 안 됐죠."
몇 년이 지나 정확한 워딩은 기억 안 나지만 그때 느꼈던 모멸감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뭐 이 새끼야? (갑자기 욕해서 죄송한데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씨발새끼들이 너무 많아서.)
구직자에게 구체적으로 수치화해서 입증을 하길 원하는 취업 시장에서 '성장'이란 단어는 얼마나 추상적인가. 직무를 바꿔가며 몇 년째 구직을 하는 내가 느낀 '성장'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았다.
성장 (은어)
내가 속한 기업이나 산업군이 대박이 터져서 주가가 오르고 연봉이 오르는 것.
꾸준한 자기 계발을 통해 대체되지 않는 인력이 되는 것.
내가 내린 '성장'의 정의가 다소 삐딱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대도시에서 3차 산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화이트 칼라 직장인들이 성장에 대해 얘기할 때를 보면 위와 같은 뜻으로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장에서 일한 것과 성장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어 그런 말을 꺼냈겠는가?
비슷한 사례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판다 할아버지'로 유명한 강철원 사육사도 젊었을 때 에버랜드를 방문한 고객이 아이한테 "공부 안 하면 커서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한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무려 월드스타 보아가 직접 사인을 받으러 올 정도로 존경받는 직업인이 되었다. 만약 그가 젊었을 때 그 말을 듣고 사육사의 길을 포기했다면 지금의 판다 할아버지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출처: 유튜브 '말하는 동물원 뿌빠TV'
'물경력'이라는 마법의 단어
아무튼 '성장'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두 음절에 담긴 핫한 기업이나 직무에 영합하고 싶은, 대체되지 않는 인력이 되어 채용 시장에서 빛나는 상품으로 존재하고 싶은 욕망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특히 테크 업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지금은 독재자가 되어 '성장'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없애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이런 말 개발 블로그에 쓰면 취업 안 되지 않나 싶지만.. 이런 거 안 써도 취업이 안 되잖아요 요즘은.)
특히 요즘은 '물경력'이란 단어도 같이 삭제하고 싶은데, 이건 사전에도 없는 말이라 독재자가 되어도 삭제할 수 없을 것 같다. '물경력'은 개발자가 되면 장밋빛 커리어가 펼쳐질 거란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레거시와 독성 말투, 임금 체불과 구조조정 등에 노출된 저연차 개발자들의 불안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위한 마법의 단어가 되었다. 신이 난 건 개발자 붐으로 돈 좀 챙긴 부트캠프 등의 사교육 업체들이다. 안 좋아진 업계 상황을 악용해 저연차 개발자들의 불안을 유도해 그들의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라니... 글을 쓰면서도 구역질이 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개발자들이 이 수작에 쉽게 넘어가고 있다. 부트캠프에 돈을 내지 않아도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내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면 해결을 할 수 있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이 '물경력'이 되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코테를 하나 더 풀면 '네카라쿠배당토'까진 아니어도 지금 이 거지 같은 데보다 나은 회사에 갈 수 있을까?'
'내가 잠을 줄이고 더 공부하면 개발 문화가 좋은 팀에서 좋은 동료들과 함께 일할 수 있겠지.'
이런 생각으로 취업을, 이직을 준비하고 있진 않은가?
물론 열심히 하는 건 좋다.
하지만 스스로의 과거나 현재를 너무 저평가하지는 말자.
솔직히 나는 문과 출신의 비전공자이고 20대 내내 하고 싶은 거 위주로만 하고 살았다. 음악도 해보고 아마추어 극단에서 활동도 해봤다. 링크드인에는 도저히 적을 수 없는 것들만 하고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링크드인에 적을 수 없는 것들이라 해도 그런 것만 하고 살았던 과거의 나를 깎아 내리고 싶진 않다. 모든 경험들이 인어공주의 소망처럼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인문학을 공부했기에 이 업계가 구직자들에게 하는 가스라이팅을 튕겨낼 수 있는 마인드셋을 얻었고 이런 글도 쓸 수 있는 것이다. 또 음악을 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캐릭터를 가진 개발자가 되면 좋을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고, 연기를 공부하고 오디션을 준비했기 때문에 채용 시장에서 내게 주어진 포지션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나는 커머스 회사 물류팀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그런데 물류 일을 하다 보면 개발을 공부하며 알게 된 알고리즘이 떠오를 때가 있다. 코드를 한 줄도 작성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그때 떠오른 알고리즘으로 어떻게 시간복잡도를 줄일 수 있는지 고민한다. 요즘은 가끔 물류팀이 하나의 서버라면 어떤 식으로 빗댈 수 있을지 생각한다. 나중에 백엔드 개발자가 된다면 물류 알바를 한 경험도 어떻게든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경험이든 간에 그저 쓸모 없기만 한 경험은 없다는 말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나.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때문에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힘들다고, 환상적인 팀에서 좋은 동료들과 '우아한' 개발을 하고 있는 저 개발자랑 내 처지가 비교되어 힘들다고 해도 너무 스스로를 저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경험들, 쓰레기라 생각했던 과거들은 당신이 성장하는 데 있어 경험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치는 본인에게든 타인에게든 인사이트를 주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출처: 드라마 '포켓은 모험을 가득 담고')
본인의 서사는 스스로 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직장인(혹은 직업인)들이 '물경력'이 되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람이란 존재가 타인의 인정과 소속감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무리에서 떨어지고 고립되는 상황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인다. 무리 생활을 통해 생존하고 문명을 개척한 인간인데 무리에서 배척되고 고립되는 게 얼마나 실존적으로 위험한지 우리는 너무 잘 아니까. 그래서 FOMO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쓰고 무리수를 둔다.
하지만 삶에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 누구도 본인의 서사를 대신 써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누가 인정해주든 말든 본인의 스토리는 스스로 쓰고 스스로 완결을 내야 한다. 타인의 인정만큼이나 스스로의 인정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재단하고 비난했을 때 뇌는 계속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밀어넣는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자기 계발을 해도 본인이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성과를 내더라도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건 '물경력'이 아니라도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의 삶과 다를 바 없다. 때문에 본인의 서사를 직접 쓰고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길이다. 본인이 본인의 서사를 직접 써내려가고 자기를 인정하다 보면 성장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내가 위에서 삐딱하게 정의한 '성장'과 다른, 보다 본질적인 성장이다.
'이건 나의 히스토리이자 나의 러브 스토리요. 그래서 가는 거요.'
글을 쓰다가 문득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마지막에 남긴 대사가 떠올랐다. 노비 출신에 '탈조선'을 한 미군 장교로 조선이 망하든 말든 이방인으로 살았을 수도 있는 유진 초이가 고애신(김태리 분)을 사랑하고 자기 서사를 직접 쓰기 시작하면서 내린 선택을 함축한 대사라 울림이 컸다.
그래서 여러분의 서사는 지금 어떻게 전개되고 있나요?